■ 학력위조 파문

한 여름 납량특집처럼 ‘학력위조’ 괴담이 이제 온 사회를 얼게 하고 있다.

미술계의 신데렐라로부터 시작된 학력위조 퍼레이드가 학원가의 스타강사, 인테리어 디자인계의 스타, 공연예술계의 대모, 방송, 연극, 영화계의 스타를 넘어 이젠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끝도 없이 무한질주 중이다.

상상을 불허하는 이 괴담은 ‘요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라고 노래했던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 속 가사 그대로다.

정말 학력을 위조하고 과장해 활동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엔 많아도 너무 많은 것 같다. 계층을 초월한 학력위조 사태는 이제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라는 괴담 급으로 폭풍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동숭아트센터 김옥랑 대표, 만화가 이현세, 라디오방송 영어강사 이지영, 영화감독 심형래, 인테리어 디자이너 이창하, 방송인 강석, 명지대 사회교육원 교수 정덕희, 월간 객석 대표인 연극인 윤석화, 명지전문대 교수인 영화배우 장미희, 국내 최대 규모의 도심 사찰 능인선원의 원장 지광스님, 중견 탤런트 오미희 등이 현재까지 도마에 오른 사회 각계의 인사들이다.

지금 우리는 자고 일어나면 새롭게 등장하는 학력위조 파문의 거침없는 행진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한마디로 난리블루스 세상이다.

요즘 사회각계에선 ‘학력까기 놀이’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 누구의 학력도 의심받는 분위기다.

특히 실력을 인정받으며 영화, 연극계에서 큰 족적을 남겨온 장미희와 윤석화의 거짓 학력은 당황을 넘어 경악스럽다. 김옥랑 학력위조 파문이 터지던 시점만 해도 연극계에 대한 그녀의 기여도를 고려해 감싸는 분위기가 일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평상시에 공공연하게 타인의 학벌을 문제 삼은 것으로 전해지는 윤석화의 경우, 학력위조 사실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임박한 시점에 ‘자백’으로 면죄부를 받으려 한 점과 심지어 자랑스런 이화여대 동문 출신 자격으로 이대 채플에 참석해 강연까지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대중의 분노를 사고 있다.

또한 2005년 월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너네들 공부 못했으니까 드라마센터 갔지. 나는 그래도 이대 출신이야’라고 했다”는 인터뷰 내용이 밝혀지면서 윤씨는 학력중심 사회의 피해자가 아닌 ‘악용자’라는 의견이 팽배하다.

우아한 여배우의 상징 같은 장미희의 경우,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과보다는 “동국대 불교학과에 학위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정원외 입학’ 개념으로 들어가 수업을 들었다”며 “이 사회에서 학력 콤플렉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학력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한 아량도 없나”며 잠적했다.

그녀의 학력은 동국대를 졸업하고 명지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모두 허위인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장충여고는 졸업생을 배출한 적이 없는 학교이고 그녀가 졸업했다는 미국 호손대는 미인가 대학인 것으로 밝혀졌다.

맞다. 그녀 말처럼 학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실력이고 경력이다. 그렇다면 왜 거짓 학력으로 자신을 포장해 그녀를 아끼는 팬들을 실망시키는가? 더욱이 올 해는 자신의 데뷔 30주년이 아니던가!

그동안 학력과 경력을 위조한 사람들은 양심고백을 통해 후폭풍을 줄이거나, 본인의 학력을 몰래 지우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정말 만물의 영장이지만 가장 어리석은 것 또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과연 거짓 학력이 영원한 비밀, 완전 범죄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의아스럽다. 학력위조가 단지 개인 자작극만으로는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기본 양심이라는 것이 있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인가?

사실 대중문화계의 학벌선호주의는 뿌리가 깊다. 60년대 초반 등장한 서울대 법대 출신 최희준과 고려대 법대 출신 김상희는 지금도 ‘학사가수’의 상징으로 통한다.

명문대 출신인 그들의 가수데뷔는 당시 우리 사회엔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학사출신 가수는 이들 외에도 많았다. 하지만 유독 명문대 출신인 그들만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는 연예인에 대한 사회인식의 전환이라 보기엔 씁쓸한 구석이 있다. 전체 연예인의 학벌 수준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폄하 시선이 존재함을 확인시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명문대 출신이라는 계급장은 언론의 관심뿐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의 차별에 필수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명 문화계 인사들의 거짓 학력 역시 이런 사회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남기웅 서울연극협회 사무국장은 “과거 고졸 출신 연극인들은 아무리 잘나도 인간 취급을 받기 힘들었다. 정부의 문화예술지원시스템도 학력 중시를 부추겨 무대예술전문인 자격증을 따려면 현장 경험보다 학사학위가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자신이 바라는 세계만을 진짜라고 믿고, 현실을 허구라고 믿는 거짓말의 최고수인 사람들을 두고 일컫는 말이 있다.

‘리플리 병(혹은 효과)’이다. 1960년에 개봉한 프랑스의 고전영화 ‘태양은 가득히’에서 알랭 들롱(1999년 리메이크 된 ‘리플리’에서는 맷 데이먼)이 연기한 리플리 역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다.

지난 13일 영국의 유력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정아 교수의 가짜 박사 학위 소동을 두고 영화 제목을 빗대 ‘The Talented Ms. Shi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요절가수인 배호가 떠오른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시 음반사는 서라벌예대 졸업으로 학력을 포장했다. 중학교 중퇴라는 학벌은 스타를 꿈꿀 수 없고 대중의 업신여김을 받을 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배호의 노래실력보다 학벌을 흠모하는가? 그의 노래실력은 대중가요사상 최정상급으로 지금도 손꼽힌다. 대중이 그에게 감동하는 것은 서라벌예대 졸업장이 아닌 어려운 가정 형편을 딛고 주경야독으로 정상에 오른 그의 인간승리임을 왜 모르는가.

중학교 중퇴의 영화감독 임권택, 고교 중퇴로 대중음악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서태지, 역시 고교 중퇴인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도 있다. 세 사람 모두 힘든 세월을 거쳐야 했지만 그들의 학벌을 문제 삼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학력 콤플렉스를 딛고 실력으로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오늘 그들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당당해 보인다.

연예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일고 있는 거짓학력 파문은 이제 대선을 앞둔 정치적 음모가 아니냐는 말까지 횡행하고 있다. 진위가 무엇이든 개인들 스스로의 도덕성 회복과 함께 사회자체의 투명한 학력공개 시스템 구축이 절실해 보인다.

하지만 간판보다는 실력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만 해결될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실력이 아닌 학력만능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는 우리 사회가 낳은 일그러진 모습들이 아닐 수 없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