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진=한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진=한화

[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한화그룹은 1981년 김종희 창업주가 갑작스럽게 타계하며 경영 위기에 처했다. 그렇잖아도 세계 경제가 ‘오일쇼크’ 여파로 요동을 치던 격동기에 총수가 경영권을 넘겨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룹 안팎의 우려는 컸다. 후계자인 장남으로의 준비없는 경영 승계는 회사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29세 청년 김승연은 “아버지 무릎에서 큰 나보다 우리 회사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며 안정적인 계승을 호언장담했다. 호언에 이유는 있었다. 이미 10대 시절부터 그룹 내 각 공장을 돌아보며 현장 교육을 받던 그였다. 결국 ‘최연소 총수’로 한화의 지휘봉을 넘겨받은 김승연 회장은 어느덧 ‘최장수 총수’로 안착했다. 이 기간 한화는 화약 계열 기업군에서 글로벌 리딩 컴퍼니 반열에 올랐다.

1981년 8월1일 취임하는 당시의 김승연 회장. 사진=한화
1981년 8월1일 취임하는 당시의 김승연 회장. 사진=한화

◇ 승부사의 승부수는 M&A

김 회장은 지난 40년간 총수로서 오롯이 성장에 매진해 왔다. 먹거리에 목말랐던 그는 인수합병(M&A)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굵직한 M&A 성장 전략은 ‘제2의 창업주’로 불리게 된 토대가 됐다.

김 회장은 총수에 오른 지 1년 만에 사업다각화를 위해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을 인수했다. 두 회사 모두 경영난을 겪고 있어 임원들의 반대가 강했다. 하지만 석유화학업을 눈여겨보던 김 회장은 “이럴 때 알짜 석유화학 기업을 싸게 사들여야 한다”며 인수를 밀어붙였고, 적자 수렁에 빠졌던 두 회사는 한화의 인수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변신했다. 한화가 10대 그룹으로 몸집을 불리게 된 결정적인 M&A였다.

두 번째 신사업으로는 유통업을 선택했다. 이 역시 창업이 아닌 M&A로 시도했다. 1985년 정아그룹을 인수해 한화호텔앤드리조트로 키워내고, 1986년 한양유통을 사들여 한화갤러리아로 성장시키며 레저·유통 사업의 초석을 다졌다. 한화갤러리아는 한국 최대 명품 백화점으로 자리 잡았고, 한화호텔앤드리조트는 국내 최대 규모의 프리미엄 종합 레저·서비스 기업으로 도약했다.

2002년 대한생명(현 한화생명) 인수는 ‘신의 한수’로 불린다. 외환위기를 거치며 계열사 수를 37개에서 17개로 줄였던 김 회장은 금융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키우기 위해 당시 누적 손실만 2조3000억원에 달하던 대한생명을 인수했다.

이후 모든 계열사 대표이사직을 내려놓고 한화생명 대표이사에만 전념한 끝에 인수 6년 만에 누적 손실을 모두 털어냈다. 한화생명은 대형 생명보험사 최초로 유가증권시장에도 상장되며 화학과 함께 한화의 양대 축으로 자리 잡았다.

2012년에는 그린 에너지에 주목했다. 김 회장은 한화를 글로벌 녹색 기업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태양광 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낙점했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기업이 누적 영업적자 4400만달러에 달하던 독일의 큐셀이다. 당시 한국 기업들은 태양광 시장 침체로 관련 사업에서 발을 빼던 시기였지만, 김 회장은 과감하게 큐셀 인수를 결정했다.

이미 2010년에 ‘질적 성장(Quality Growth) 2020 비전’을 선포하며 중국 솔라펀파워홀딩스를 인수하는 등 태양광 분야를 중심으로 신수종(新樹種) 사업 육성에 강한 드라이브를 건 상태였다. 태양광 사업은 회사의 규모를 넘어 질적인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는 판단에 기인했다고 당시 관계자들은 회고한다. 한화큐셀은 한국·미국·중국·말레이시아 등지에 생산 공장을 보유하며 태양광 모듈 부문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김 회장은 2014년 형이 확정된 이후에는 막후에서 한화의 경영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이듬해 한화-삼성 간 대형 빅딜을 이뤄냈다. 이는 김 회장의 M&A 40년 역사에서 화룡점정으로 평가되는 업적이다.

김 회장은 방산과 에너지 사업을 위해 삼성그룹의 방산‧화학 사업부문 4개 계열사를 통째로 1조9000억원 규모에 인수했다.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의 자발적 산업 구조조정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김 회장은 삼성에서 편입된 삼성테크윈(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삼성탈레스(현 한화시스템), 삼성종합화학(현 한화종합화학), 삼성토탈(현 한화토탈)에 이어 2016년 두산DST(현 한화디펜스)까지 인수하며 국내 방산업계를 장악했다. 이들 기업들은 한화의 효자 계열사로 꼽힌다.

2021년 오랜 공백을 깨고 한화, 한화솔루션, 한화건설 등 계열사 3곳 미등기임원에 오르며 한화 경영에 공식적으로 복귀한 김 회장의 시선은 우주로 향해 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를 개발한 민간 인공위성 제조업체 쎄트렉아이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항공 엔진의 역량을 완성하는 우주 산업 밸류 체인을 구축한 것이다.

이는 한화의 우주 산업 총괄 조직인 ‘스페이스 허브’의 출범에 밑바탕이 됐다. 김 회장은 한화 후계자 1순위인 장남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에게 스페이스 허브의 지휘권을 맡기는 등 경영 수업도 착착 진행 중이다.

한화는 김 회장의 거침없는 M&A 진격으로 재계 7위의 반열에 올랐다. 2021년 기준으로 총자산은 김 회장 취임 당시 7548억원에서 229조원으로 304배 늘었다. 매출액은 1조1000억원에서 61조1300억원으로 56배 증가했다. 계열사는 19개에서 91개로 확장하며 대그룹으로 변모했다.

사진=한화
사진=한화

◇ 성공비결은 '신의'

김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남성성이 강하다. 이립(而立)이 채 되기 전에 회사를 물려받은 혈기왕성한 젊은 회장이 40년간 사세를 키운 토대는 ‘신의’로 집약된다.

그의 성격은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한화에너지 정유부문을 현대정유에 매각할 때 100% 고용 승계 원칙을 내세운 일화에서 두드러진다. 실제 계약 성사 이후 한화에너지 706명과 한화에너지프라자 456명은 완전히 고용 승계됐다.

굵직한 인수합병을 별다른 불협화음 없이 성공한 것도 신용과 의리를 중요시하는 그의 성격 덕이라는 게 재계의 평판이다. 한화의 한 관계자는 “M&A 과정에서의 최우선 기조는 고용 보장”이라고 귀띔했다.

김승연 회장이 에드윈퓰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아시아연구센터 회장과 함께 한 모습. 왼쪽부터 김승연 회장, 에드윈 퓰너 회장, 김동선 상무. 사진=한화
김승연 회장이 에드윈퓰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아시아연구센터 회장과 함께 한 모습. 왼쪽부터 김승연 회장, 에드윈 퓰너 회장, 김동선 상무. 사진=한화

◇ 재계의 민간외교관

김 회장은 재계에서 민간외교관으로 통한다. 대표적인 미국통이다. 2001년에는 한미교류협회 초대의장을 맡은 데 이어 민간사절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2003년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한국으로 초대했고, 딕 체니 부통령과 독대하기도 했다. 미국 내 재계에 영향력이 큰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의 에드윈 퓰너 회장과는 40여 년 동안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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