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화건설, 다산베아채골프 &리조트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역임
그의 빈자리 유난히 그리워하는 이들 많아
[대전=토토 사이트 커뮤니티 이광희 기자] “살다보면 보편적인 삶이든 각박한 삶이든 어느 한때는 자기 모습을 잃고 무기력해질 때가 있다. 난 그렇게 힘들 때 글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나의 참 모습을 성찰해보고자 했고 이상적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였다.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이 질문과 고민은 내 인생의 업이요, 정신이다. 삶이란 만남, 삶이란 관계다. 그것 외에 소중한 것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김호남 수필가가 자전적 수필집 ‘흰그늘’에 남긴 글이다.
목포 김호남 수필가의 유고집 ‘상업의 길 50년, 한적한 삶을 찾는다’가 17일 출간됐다.
그의 추도 3주기를 맞아 살아생전 펴려고 했던 책을 유족들이 펴냈다. 틈틈이 남겨놓았던 유작들을 모은 산문집이다.
김호남 수필가는 2007년 수필집 ‘새들은 함부로 집을 짓지 않는다’를 펴낸 것을 시작으로 ‘삶의 물레는 돌고 도는데’ ‘바다를 품다’ ‘아름다운 유산’ 등 6권을 잇 따라 출간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문학적 목마름으로 수필을 사랑했던 인물이다. 작고한 목포출신 김지하 선생의 후배며 제자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그는 늘 깨어있기 정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몸부림쳤다.
“남해안 시대는 속도와 시간의 경제성에서 앞서야 한다. 나는 쉬지 않고 그에 대해 고민해 왔고 노래하듯 소리치고 다녔다. 해양문화가 비어있는 전남 목포. 한류의 하늬꽃샘 멈췄는가. 해양문화가 새로운 시대의 키워드다. 그 용광로가 이곳 이 시대에 와 있음을 왜 모르는가?”
시대를 앞선 자세로 그는 고향 목포에 대한 사랑을 외쳤다. 술자리에서도 그는 “바다를 통해 세계일류국가를 지향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목청을 높였다.
지역에서 그는 수필가보다 사업가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목포청년회의소 회장, 대학주택건설협회 중앙회 감사, 목포 상공회의소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근화건설 및 우남건설 회장, 다산에아채골프&리조트 회장 등을 역임했다.
게다가 목포문태중고 총동문회장, 한중문화협회 협의회장, 우남문화장학재단 이사장, 학교법인 근화학원 목포중앙고 이사장 등 사회봉사에도 시간을 쪼개면서 살았다.
이러면서 수필집을 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늘 고민하며 글을 썼다.
그는 생전에 “글쓰기는 내면을 가꾸는 자기 성찰의 행위며 사업 통찰력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때문인지 기부에도 솔선수범했다. 기부 천사의 대명사로 불리는 아너소사이터티 클럽 회원이기도 했다. 모범납세자로 포상도 많이 받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하는 사회적 기업가였다.
유족들이 그의 뜻을 기려 2008년부터 “꽃이 피는 장학금”을 지역 후학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는 이 책 ‘상업의 길 50년 한적한 삶을 찾는다’를 다산베아채골프&기조트 개장과 함께 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골프장 건설 막바지단계에서 갑작스레 쓰러지는 바람에 유작이 되고 말았다.
49년 목포 출생인 그는 목포해양대에서 경영학 석사, 목포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열성파다.
“부산은 영구망해, 신령스러운 거북이 바다로 나가는 형상이다. 목포는 회룡고조, 산의 지맥이 한 바퀴 돌아 본산과 마주하는 형국이다. 때문에 곤륜산의 정기를 끌어오는 형상이다. 이들 두 도시가 손잡고 장보고의 길을 연다면 동아시아를 찬란히 빛낼 것이다”
이는 그가 살아있을 때 입에 종을 달고 하던 외침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비운 자리를 서운해한다. 그가 있음으로 아름다웠던 목포를 알기에 그렇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늘 웃는 얼굴은 보는이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그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호남이 행님’
목포는 항구다
마음 드나드는 곳
호남이 행님의
본향
잔잔한
금물결 위로
행복 실은 배들이 오가고
유달산 기둥바위
그늘아래
하늘품은 마음이 머문다.
목포는
오늘도
행님의 그리움을 지고
그의 넓은 등짝에
삶을 기댄다.
목포는 항구다
호남이 행님이
그곳에 있다. (2015.소설가 이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