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에 한국 첫 리사이틀 ‘거장의 클래스’ 선사
드뷔시 ‘달빛’은 명쾌한 터치·투명한 울림 감동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Sh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Sh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데일리한국 민병무 기자]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장면이 드디어 눈앞에 펼쳐졌다. 올해 78세의 피아니스트는 무대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동안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1996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2013년),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2016년)와 협연해 한국 팬을 세 번 만났지만, 리사이틀은 이번이 처음. 언제 다시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는데, 이렇게 우리 앞에 선 그를 본 관객 모두는 설레고 흥분됐다.

2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마리아 조앙 피레스는 먼저 합창석 팬들과 눈을 마주친 뒤, 몸을 돌려 3층까지 꽉 채운 관객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소홀한 곳을 두루 살피는 베테랑의 연륜이다. 피아노에 앉은 그는 주저 없이 건반에 손을 댔다. 명쾌한 터치에서 오는 투명한 울림, 치밀하고 청아한 감각으로 만들어 내는 색채 등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언터처블 사운드가 가슴을 파고든다.

첫 곡은 프란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3번’. 포르투갈 출신 1944년생 피아니스트의 두 손엔 산전수전 이력이 고스란히 박혀 있지만,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명장면 그대로 ‘봄날의 햇살’이다. 포근하다. 따듯하다.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Sh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Sh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Sh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Sh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7월의 어느 날, 스물 두 살의 슈베르트는 슈베르티아데(‘슈베르트의 밤’이라는 뜻으로, 슈베르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그의 음악을 듣는 모임) 친구인 바리톤 요한 미하엘 포클과 함께 빈을 탈출해 북부로 도보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알프스 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 슈타이어로, 포클의 고향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아마추어 첼리스트인 마을의 실력자 질베스터 파움가르트너를 만나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호의와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불후의 5중주 ‘송어’를 작곡했다. 파움가르트너는 마을 유지의 딸인 열여덟 살의 요제피네 폰 콜러를 소개해준다. 슈베르트는 형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너무 예쁘고 피아노도 잘 쳐. 그리고 내 노래들을 불러줄 예정이야”라고 뜨거운 마음을 적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13번 소나타다.

피레스의 손가락 마법은 상상 이상이다. 1악장에서 새싹처럼 땅을 뚫고 나오는 사랑의 감정을 풍부한 선율과 부드러운 감성으로 담아냈다. 제시부뿐만 아니라 전개부와 재현부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주제선율이 산뜻하다. 2악장은 채 5분이 되지 않지만 세밀한 감정의 중심을 잡아냈다. 3악장은 재잘재잘 즐겁고 흥겹다. 위트와 유머도 충만하다. 젊은 작곡가의 인생을 빛냈던 평온한 여름날의 여행과 예쁜 소녀에 대한 추억이 풍경화로 다가왔다.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마친 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Sh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마친 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Sh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마친 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Sh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가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마친 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ShihoonKim/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다음은 모두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클로드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을 선사했다. ‘플렐류드’ ‘미뉴에트’ ‘달빛’ ‘파스피에’ 중 역시 관객의 최애곡은 ‘달빛’. 그동안 영화와 광고의 배경음악으로도 수없이 들었지만, 아름다움과 우울함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분위기는 늘 신비롭다. 서정의 극치다.

슈베르트는 서른한 살의 짧은 생을 살았다. 1828년 세상을 떠난 해에 작곡한 마지막 소나타가 21번이다. 따스하고 꿈결 같은 1악장을 지나면 쓸쓸한 2악장이다. 신기하다. 금세 눈이 쏟아지고 비가 내릴 것 같은 악장이다. 누가 불쑥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연인의 이름 석자만 꺼내도 왈칵 눈물이 흐를 것 같다. 피레스는 원래의 템포보다 살짝 느리게 연주해 슬픔의 크기를 더 키워내는 스킬을 발휘했다.

소박하고 경쾌한 스케르초의 3악장은 “내가 언제 울었어”라며 다시 환한 표정으로 다가왔고, 진지함과 풍부함 그리고 리듬감이 넘친 4악장은 긴 여정을 시원하게 마무리했다.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자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몇 차례 커튼콜에 응한 피레스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객석은 환호했다. 곧 80을 바라보는 나이 탓에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한 곡을 더 들을 수 있다니. 그는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을 앙코르로 들려줬다.

피레스는 2018년 건강 문제로 은퇴를 선언했다가 복귀했다. 음과 음의 이음이 살짝 단절되는 느낌을 보였지만 점차 본색을 드러내며 “역시 마리아 조앙 피레스!”라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흐트러짐 없는 명쾌한 음색과 또렷한 톤 컬러를 앞세워 세밀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특히 슈베르트 소나타 13번과 21번을 더 사랑하게 만들었다. 원더풀 투나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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