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 이어 청구 간소화까지 덮쳐 고민
[데일리한국 박재찬 기자] “갈수록 영업하기 어려워지네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 보험설계사의 첫 마디다. 최근 빅테크의 보험 비교·추천 서비스 허용에 이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관련 법안까지 국회를 통과하면서 보험설계사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9년 이후 무려 14년 만에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국회를 통과하면서 보험사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특히, 중계기관으로 거론되고 있는 보험개발원의 역할과 지위 상승에 대한 기대도 나오고 있다.
17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국회 정무위원회는 전날(16일) 법안심사소위를 열고 실손보험 청구 절차를 전문 중계기관에 위탁해 청구 과정을 전산화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보험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은 향후 정무위 전체회의, 법제사법위원회를 차례로 거쳐 본회의에 상정된다.
실손보험은 사보험이지만 공보험인 건강보험이 책임지지 못하는 영역을 보장하는 상품으로, 가입자만 4000만명에 육박한다. 그동안 보험금 신청서, 진료비 영수증, 진단서 등 종이 서류를 발급받아 우편 또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제출해야 해 절차가 번거로워 가입자들의 불만이 쌓여왔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병원이 환자 진료내역 등을 전자문서 형태로 중개기관을 거쳐 보험사에 보내 실손보험에 가입한 환자가 보험금을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윤석렬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이기도 했던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 관련 법안은 지난 2009년 국민권익위가 실손보험금 청구 절차를 개선하라고 권고했지만, 의료계 반발 등에 부딪혀 14년째 표류 중이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관련 개정안의 정무위 통과에 대해 보험사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보험업계는 아직 거쳐야 할 단계는 많지만 번거로운 절차 탓에 그동안 청구조차 하지 않은 실손보험금을 앞으로는 손쉽게 고객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로 기대하고 있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14년 동안 논의해온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첫발을 뗀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며 “앞으로 여러가지 절차 및 구체화 등이 많이 남았지만 국민보험인 실손보험의 소비자 편익을 위해 꼭 필요한 시작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어 “소비자 편의성이 획기적으로 제고될 것이라는 점에서 늦었지만 환영하며, 청구 간소화 서비스가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시스템 구축 등에 힘쓸 것이다”고 말했다.
또 보험업계 일각에서는 보험개발원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지위가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시행되면 보험사, 실손보험 가입자, 병원을 연결해 줄 중계기관이 필요하다. 당초 복지부 산하 기관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유력한 중계기관으로 거론됐다. 하지만 의료계의 거센 반대로 정무위는 중계기관을 보험사·의료기관이 직접 시스템을 구축해 운영하거나 공공성·보안성·전문성 등을 고려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관에 위탁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보험개발원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중개기관으로 급부상했다.
허창원 보험개발원장은 “보험개발원엔 보험회사의 모든 데이터가 들어와 전산적으로 보관하지만 단 한 건의 오남용과 유출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정보 유출을 정보보호 측면에서 우수하다”며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국민들께 유익한 제도이기 때문에 맡겨준다면 얼마든지 담당할 각오와 준비가 돼 있다”며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중계기관 역할에 대한 자신감을 들어내기도 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국회 문턱을 넘었다는 소식에 보험설계사들의 걱정은 또 늘었다. 보험설계사들에게 의무보험인 자동차보험과 대표 국민보험인 실손보험은 일명 ‘미끼상품’으로 불린다. 자동차보험과 실손보험을 통해 건강보험, 화재보험, 어린이보험 등 다른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보험설계사들은 계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자동차 사고나 병원이용 시 발생하는 보험금을 대신 청구해주면서 고객과 접점을 만들기도 한다. 설계사들 입장에서는 보험금 청구 간소화가 시행되면 고객과의 접점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다.
실제 보험영업 방법 중 ‘병원인하우스영업’이 있다. 보험설계사가 병원에 상주하면서 내방하는 환자의 보험금을 보험사에 청구해주고, 동시의 고객이 보유한 보험을 점검하고, 리모델링하는 영업 방식이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시행되면 병원인하우스영업도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대형 GA 관리자는 “곧 시행할 빅테크의 보험 비교·추천에 국회 문턱을 넘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까지 기술의 발달로 보험설계사의 영업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로 소비자들은 소액의 보험금까지 촘촘하게 챙길 수 있지만, 향후 보험계약 시에는 고객이 예상치 못한 인수 거절, 보험료 증가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