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 패스트트랙 도입에 신탁방식 ‘사업기간 단축’ 장점 무색
올해부터 사업 추진시 주민동의율 기준 상향...계약 해지는 쉬워져
[데일리한국 김하수 기자] 최근 몇 년간 지지부진한 재건축‧재개발현장의 구원투수 역할을 했던 신탁방식 정비사업이 암초를 만났다. 정부가 정비사업 규제 완화책을 잇따라 내놓으며 빠른 사업 추진이 가능한 신탁방식의 매력도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23일 부동산 신탁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신탁사가 수주한 신탁방식 정비사업 수주 건수는 총 36건이다. 수주액(신탁 보수액 기준)은 2300억원 규모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신탁방식 정비사업은 신탁사가 재건축·재개발 등 도시정비사업을 단독으로 시행하거나 조합 또는 토지 등 소유자를 대신해 사업을 시행하는 방식이다. 사업비 조달 문제로 지지부진했던 침체 사업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지난 2016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 이후 도입됐다.
크게 신탁사가 정비사업을 직접 시행하는 ‘사업시행자’ 방식과 조합 업무를 대행하는 ‘사업대행자’ 방식으로 나뉜다. 사업시행자 신탁방식은 신탁사가 사업 시행의 주체가 되고 주민대표회의를 구성해 의견을 전달하는 구조로 추진된다. 사업대행자 신탁방식은 사업 시행의 주체는 조합이 역할을 하고 신탁사 그 외 업무를 대행한다.
국내 신탁사들은 2016년 도시정비법 개정 이후 신탁방식 정비사업의 장점을 내세우며 서울 소재 재건축 단지를 대상으로 수주 활동을 벌여왔다. 그 결과 ‘재건축 대장주’로 꼽히는 압구정 등 강남권 재건축 단지와 여의도, 목동 등 알짜 재건축단지들이 신탁방식으로 사업을 추진 중이다.
신탁방식 정비사업은 신탁사의 탄탄한 자금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원활한 자금 조달과 사업 기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점이 최대 장점으로 꼽힌다. 조합이 없어 사업 진행 과정에서 불거지는 주민 간의 갈등으로 사업이 지연될 우려도 적다.
한 신탁사 관계자는 “신탁사가 정비사업을 이끌면 시행 방식은 최대 3년, 대행 방식은 최대 2년 사업 기간을 줄일 수 있다”며 “사업 속도를 내기 위해 인허가를 빠르게 받고 설계 등 각 단계에 필요한 자금을 적기에 투입하는 것이 중요한데 신탁사가 자체 사업비를 조달하기 때문에 제때 자금을 투입해 사업을 빨리 진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최근 몇 년 동안 신탁방식 정비사업이 재건축‧재개발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올해부터는 신탁방식 정비시장 규모가 축소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부가 1·10부동산 대책을 통해 재건축 패스트트랙 도입을 예고하면서 부터다.
정부가 정비사업 촉진을 위해 내놓은 재건축 패스트트랙은 아파트를 지은 뒤 30년이 넘었다면 안전진단을 생략하고 추진위원회나 조합을 먼저 설립한 뒤 안전진단은 사업계획승인 전까지만 받도록 하는 방식이다. 특히 정비구역 지정 전에도 조합 신청이 가능해져 정비구역 지정과 조합 설립을 병행할 수 있다.
그러나 재건축 패스트트랙 적용 대상에서 신탁방식 재건축사업은 제외되면서 그동안 빠른 사업추진을 강점으로 내세웠던 신탁방식 정비사업의 메리트가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서울시와 5대 광역시의 경우 신탁방식이 오히려 조합방식보다 사업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신탁사 계약 해지 조건이 완화된 것도 신탁사들에겐 악재로 꼽힌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10월 ‘신탁방식 정비사업 표준계약서·시행규정’을 확정했다.
이 표준안에 따르면, 신탁 계약을 체결한 주민 100%가 계약 해지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신탁사가 계약 후 2년 내 사업시행자로 지정되지 못하거나, 주민 75% 이상이 찬성할 경우 신탁 계약을 일괄 해지할 수 있도록 했다. 신탁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다가 조합방식으로 갈아탈 수 있는 길이 넓어진 것이다.
아울러 사업시행자 지정 전에 신탁사와 협약 등을 체결하는 정비사업지의 경우 신탁 방식 추진에 대해 일정 비율 이상 주민 동의를 얻도록 했다. 구역 지정 이전에 예비신탁사 선정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신탁업계는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는 전략이다. 신탁업계 관계자는 “최근 일부 신탁방식 사업을 모색했던 정비사업지에서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면서 신탁사가 가진 전문성을 의심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면서 “눈에 띄는 성공 사례가 많지 않다보니 주민들 사이에서 신탁사의 전문성과 사업 추진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정부의 신탁방식 정비사업 표준계약서 확정으로 신탁사의 사업관리 책임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신탁사들이 투명하고 속도감 있는 사업을 추진해 시장참여자들의 인식전환을 이끌어 내면 신탁방식에 대한 시선도 점차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