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김언한 기자] 면종복배(面從腹背). 겉으로는 복종하지만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의미의 한자성어다. 개인이 면종복배하면 교활하다고 비난받는다. 주로 부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의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한 저명한 역사학자는 지난해가 '전쟁의 해'였다고 했다. 2022년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지속됐고, 팔레스타인의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전쟁으로 중동 전체에 불안감이 확산했다.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 패권 다툼도 치열해졌다. 총, 미사일 등 화기 없이 치러지는 초강대국들의 경제·안보 주도권 싸움이다. 한국은 미국의 공급망 재편 전략에 따라 미국 편에 서서 중국에 등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산업 구조 특성상 중국과 디커플링(분리)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사실이다. 지난 8월 중국(홍콩 포함)에 대한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58억1000만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27.4% 증가했다. 이는 대미 반도체 수출(8억1000만달러)의 7배가 넘는다.
한국의 전체 반도체 수출이 10개월 연속 두자릿수 증가하게 된 주요 원인도 대중 수출이 늘어난 데서 찾을 수 있다. 단순 수치로 8월 대미 반도체 수출은 90% 늘었지만 몸집이 원체 작기에 수출 호조의 공신으로 띄워주기 어렵다.
미국은 첨단 공정으로 만든 일반 D램에 이어 최근에는 고대역폭메모리(HBM)에 대한 중국 수출 규제를 공식화했다. 지금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중국 기업에 HBM을 직접 공급하기 어렵다고 한다. 주로 홍콩에 있는 유통기업 손에 들어간 뒤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이라는 거대 반도체 시장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바이두와 같은 중국 빅테크들은 화웨이의 AI 가속기를 대량 구매하고 있다. HBM이 필요한 중국 기업은 하나둘씩 늘어난다.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란 말은 요즘 잘 쓰이지 않는다. 이는 안미경세(안보는 미국, 경제는 세계)라는 말로 바뀌어 그럴듯해 보이거나, 최근에는 안미경미(안보는 미국, 경제도 미국)를 외치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망각한 말이다.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데는 한계가 있다. 2027년 AI에 대한 중국의 투자 규모가 전 세계 투자액의 약 9%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니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의 기회손실을 생각해야 한다.
미국의 요구에 끌려다니면 중국이 원자재를 무기 삼아 한국 반도체 산업을 위기에 빠뜨릴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미국의 대중 견제는 지속되고, 한국 기업은 샌드위치 신세를 못 벗어날 것이 분명하다. 상황에 따라 면종복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