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김언한 기자] 잠복기. 병원체에 감염된 후 증상이 몸에 나타날 때까지의 기간이다. 드러나지 않던 것이 바깥으로 표출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뜻한다.
맹수는 성공적인 사냥을 위해 잠복이라는 사전 단계를 거친다. 목표물의 상태를 확인하고,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간다. 상위 포식자도 조건이 완성되기 전 사냥감에 발각되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여서 잠복한 누군가에게 습격당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기업과 같은 집단활동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잠복이라는 단어를 기업활동에 적용하면 이는 보안 아래 이뤄지는 연구개발(R&D)이라고 할 수 있다. 경쟁사를 일순간에 압도해버릴 수 있거나, 시장의 판을 바꿀 수 있을 만큼 파괴력을 갖춘 것이라면 이는 더욱 비밀리에 행해진다.
기업은 연구개발 정보가 새 나가는 걸 원치 않는다. 기술 개발에서 촌각을 다투는 반도체 산업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중요한 기술개발 성과는 적절한 타이밍에 공개돼야한다. 그렇게 했을 때 이는 더 강력한 것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SK하이닉스가 낸드플래시나 모바일 D램에서 거둔 성과를 최근 잇달아 발표한 것은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하다. 업계에선 고대역폭메모리(HBM)와 더블데이터레이트(DDR)5 등을 시작으로 SK하이닉스가 차세대 메모리에서 삼성전자를 앞지르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확산하고 있다.
HBM과 DDR5 D램은 모두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보다 앞서 개발한 제품들이다. 최근 SK하이닉스가 321단 낸드플래시를 내후년 상반기 양산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공개했을 땐 삼성전자도 경각심이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SK하이닉스가 300단 이상의 낸드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과 대략적인 양산 일정은 언론 보도를 통해 전해진 적이 있다. 전 세계 낸드 개발자들은 언론 보도에 앞서 학회 등을 통해 이 회사의 300단 이상 낸드 개발 소식을 공유했을 것이다.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와 차세대 제품 경쟁에서 분위기를 상당히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 관계자는 과거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를 쫓는 만년 메모리 2위 업체였다면 지금은 회사를 보는 시선이 상당히 달라졌다고 했다.
동물의 잠행이나 기업의 연구개발 모두 큰 틀에서 놓고 보면 적자생존의 법칙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과정이다. 자연의 세계나 인공의 세계 모두 큰 변화는 은밀히 이뤄진다. 최근 SK하이닉스의 잇따른 성과는 메모리 산업에서 지각변동의 전조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