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한국 16일자 31면 게재

선물 꾸러미 일러스트. 사진출처=네이버 이미지
선물 꾸러미 일러스트. 사진출처=네이버 이미지

천혜향 한 상자가 배달되었다. 
누가 보냈는지 궁금해서 발신인을 찾았지만 이름이 없다. 나이 들어 둔해졌나 싶어 글자를 한 자 한 자 지워가며 찾았지만 발신인을 찾을 수가 없다. 누가 보냈을까? 일부러 안 썼을까? 우체국에 전화하면 알려주려나? 혼자 마음을 태우다 일단 내용물을 냉장고로 옮기고 상자는 다용도실 바닥에 두었다. 이삼일 지났을까. 상자가 없어졌다. 내가 연거푸 외출하는 동안 남편이 문밖에 버렸고 그것을 박스 수거하는 분이 가져간 후였다.

이제 영영 발신인을 찾을 길이 없어졌다. 내게 천혜향을 보내준 사람이 나를 향해 감사 인사도 안 한다고 여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누가 보내준 것인지도 모르는 선물을 놓고 주위에서 내게 보낼만한 사람들을 두루 떠올려 보았다. 혹시 잘못 배달되었다고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을까하여 일주일을 넘게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천사의 선물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먹는 천혜향은 맛이 달랐다. 천사가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먹을 때마다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지고 무엇보다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한 분이 보냈을 터,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고맙게 여겨졌다. 문득 나도 따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분들 중에 선물이라면 부담스러워 할 몇 분을 골라 발신인 없이 보내달라는 주문과 함께 청송 사과를 배달시켰다.

며칠이 지나도 잘 받았다는 연락이 오지 않자 흐믓해졌다. 그들도 나처럼 궁금해 하다가 천사의 선물이라 여길 것을 생각하니 괜히 즐거워졌다. 그러나 집요하게 배달처를 통해 발신인을 추적한 분들의 전화를 받았을 땐 천사도 아닌 것이 천사 노릇을 한 것 같아 오류인 것처럼 했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두 분에게선 연락이 없다. 부디 그분들도 천사를 만났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신의 처지와 상대방을 고려한 수준에서 센스있는 선물을 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선물이란 받아서 즐겁고, 전해서 행복한 마음이 동시에 성립해야 성공한 선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균형이 깨지면 뇌물이 될 수도 있고 관계가 어긋날 수도 있다. 반면 한 번의 선물로 인생 최고의 감동을 전하기도 하고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오래전 농촌 마을 산자락에 살 때였다. 도시에 사는 지인들이 펜션처럼 놀러 오곤 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늘 불쾌하게 했다. 올 때마다 썩기 직전의 과일이나 유통기간이 지난 빵을 사왔다. 그걸 알면서 그를 친절하게 대하려면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그런가 하면 분명 형편이 어려운 걸로 아는데 고급 먹거리를 푸짐하게 사오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의 호주머니가 걱정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가 돌아갈 땐 선물 받은 것 이상의 물건을 챙겨주거나 주머니에 몰래 차비를 넣어 주곤 했다.

지난겨울엔 여행을 갔다가 감기에 걸렸는데 돌아와 진단하니 독감이었다. 생애 처음 앓는 독감의 위력은 대단했다. 겨우 누룽지를 끓여먹고 누워있는데 누군가 찾아왔다. 같은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언니였다. 내가 독감 걸렸다는 소리를 듣고 밥상을 차려왔다. 전복죽 한 냄비에 마늘장아찌, 옥돔구이와 동치미, 미역줄기 볶음, 그리고 보온병에 따뜻한 차를 담아왔다.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왔냐고 성화를 부렸지만 내 마음은 울음 범벅이 되었다.

같은 단지 내라도 산비탈 동네라 그 언니 집에서 우리 집에 오려면 비스듬한 언덕길을 올라와야 하는 약 200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조금 전 누룽지를 배불리 먹었지만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전복죽을 꾸역꾸역 다 먹었다. 따뜻하고 진한 정성과 사랑으로 만든 음식 한 끼는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천사의 선물이 되었다. 선물이란 이렇듯 주고받는 사람이 분명한 행위나 사건으로 알고 있었던 내게 발신인 불명의 선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천혜향을 받고서야 오래전부터 발신인 불명의 많은 선물들이 내게 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를 끊임없이 일으켜 세우는 가족과 내게 다리가 되고 사다리가 되어 주신 스승들, 내 곁에 상생의 기운으로 와있거나 혹은 지나간 많은 인연들이야말로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천사의 선물들 아니겠는가. 낮은 대문을 맞대고 사는 마을 이웃들은 덤으로 받은 보너스다.

어디 사람뿐이랴. 내가 고통 속에서도 다시 사랑할 힘을 얻게 하고, 절망 속에서도 다시 희망을 붙잡게 한 많은 문학 작품들, 인생과 세상을 이해하고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한 여러 인문학 책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인생 낙오자가 될 뻔했는데 이들로 나는 얼마나 대견해졌는가. 어디 또 책뿐이랴. 철 따라 빛깔을 바꾸는 숲과 하늘, 햇빛과 바람과 폭우까지,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들 모두 천사가 보낸 아름다운 선물들이리라.

천사가 길을 여는 동트는 새벽이다. 오늘도 홀로 남겨진 자들이 흘리는 눈물 속에, 상처받은 영혼이 숨어드는 그늘 속에, 세상의 모든 아픈 사람들의 병상에, 그리고 삶의 고통으로 방황하는 사람들과 늘 허우적거리는 내 마음속에, 천사의 선물이 계속 배달될 것이다.

정진희 수필가. 사진=주간한국 제공
정진희 수필가. 사진=주간한국 제공

◆정진희 주요 약력 

△서울출생 △에세이플러스'(현 한국산문.2007) 등단 △한국산문 출판국장 △대담집 '외로운 영혼들의 우체국', 수필집 '우즈강가에서 울프를 만나다' '떠나온 곳에 남겨진 것들' △윤오영문학상, 남촌문학상, 조경희수필문학 신인상, 박종화문학상 등 수상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