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오해는 풀리지 않으면 해묵은 숙제가 된다. SK그룹은 30년 전 겪었던 ‘특혜시비’에 아직 시달린다. 이동통신 사업 진출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SK텔레콤은 1996년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라는 성과를 이룩했다. 사진=SK
SK텔레콤은 1996년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라는 성과를 이룩했다. 사진=SK

◇ 기술보국(技術報國)

SK(당시 선경)의 속사정은 이렇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무선정보통신을 그룹의 미래 성장 동력으로 낙점하고, 1984년 미주경영기획실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신설했다. 이어 1989년 정보통신 선도국가인 미국에 현지법인 유크로닉을, 1991년에는 국내에 선경텔레콤을 각각 설립하며 이통 사업 진출의 속도를 올렸다.

선경이 이통 사업을 본격화할 기회를 맞은 해는 1992년이다. 그해 4월 체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제2이동통신 민간사업자 선정 계획을 발표했다. 선경을 포함해 포항제철·코오롱·쌍용 등 6개 컨소시엄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사업권은 7년간 탄탄히 준비해온 선경에게 돌아갔다. 1만점 만점에 8388점으로, 2위 포항제철(7496점)과 3위 코오롱(7099점)을 큰 격차로 따돌렸다.

그러나 정치권과 얽힌 혼맥(婚脈)이 오해를 낳았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최 선대회장은 사돈 관계였다. 이를 두고 대선을 앞둔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 측은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최 선대회장은 “특혜 시비를 받아가며 사업을 할 수 없다”면서 “오해 우려가 없는 차기 정권에서 실력으로 승부해 정당성을 인정받겠다”며 사업자 선정 일주일 만에 사업권을 반납했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그해 12월 제1이동통신사업자(한국이동통신) 민영화와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동시에 추진했다. 그러면서 노태우 정부에서 제기된 특혜 의혹을 의식한 듯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주도해 사업자를 선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사업자 선정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복잡하니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정리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당시 공교롭게 전경련 회장이었던 최 선대회장은 또다시 공정성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며 아예 불참을 선언했다.

대신 최 선대회장은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과정에 참여했다. 그런데 선경의 참여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이동통신의 주가가 급상승했다. 민영화 발표 전 8만 원대였던 주가는 30만 원대로 수직 상승했다. 결국 선경은 평소 주가보다 4배 이상 높은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했다.

당시 약 600억 원만 부담하면 지배주주가 될 수 있었지만, 선경은 7배가 넘는 4271억 원을 들여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다. 선경 내부에선 지나치게 높은 가격이라는 우려가 나왔지만, 최 선대회장은 “이렇게 비싸게 사야 나중에 특혜 시비가 일지 않는다”면서 “회사가치는 앞으로 더 키우면 된다”며 논란을 일축했다.

한국이동통신 인수 직후 선경은 통신기술 고도화에 집중했고, 1996년 세계 최초로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디지털 이동전화를 상용화했다. 세계 이동통신시장에 한국의 이름을 알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다. 1997년 SK텔레콤으로 사명을 변경한 뒤 2002년 CDMA 2000 서비스와 2013년 LTE-A를 상용화하는 등 잇단 ‘세계 최초’ 타이틀을 거머쥐며 국내 대표 통신사업자로 자리매김했다.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왼쪽)이 1981년 초 내한한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앞줄 두 번째)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SK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왼쪽)이 1981년 초 내한한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앞줄 두 번째)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SK

◇ 자원부국(資源富國)

특혜시비는 SK이노베이션의 전신인 유공 인수 과정에서도 있었다.

유공의 민영화 방침이 발표된 1980년 당시 재계 10위권의 선경이 규모가 훨씬 큰 기업들을 제치고 인수전의 승자가 될 것으로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부가 선경을 선정한 배경에는 당시 전 세계를 휩쓴 1,2차 석유파동에서 보여준 발군의 능력에 있다.

선경은 안정적인 원유수급 능력 등을 보여주며 비산유국인 우리나라가 에너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탄탄한 사우디아라비아 인맥을 바탕으로 자원외교에 힘써 사우디아라비아의 야마니 석유장관으로부터 하루 5만 배럴의 공급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유공 인수전에서 정부가 내건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원유 수급 능력이었기에 결국 1‧2차 석유파동에서 해결사 역할을 했던 능력은 선경이 유공을 이끌어갈 적임자로 낙점 받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선경은 유공을 인수한 후 1984년 예맨 마리브 광구에서 첫 유전 개발에 성공하는 등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을 ‘무자원 산유국’으로 탈바꿈시켰다.

유공은 2011년 SK이노베이션으로 사명을 바꾸고 세계 최대 정유공장이자 복합 석유화학 단지를 갖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21년 2월 SK하이닉스 경기 이천시 M16 팹 준공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SK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21년 2월 SK하이닉스 경기 이천시 M16 팹 준공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SK

◇ 사업보국(事業報國)

한국이통통신과 유공에 이은 현대하이닉스 인수는 기업가정신으로 불확실성을 돌파한 성공 사례다.

현대하이닉스(SK하이닉스 전신)는 2012년 인수 당시 채권단 관리를 받으며 연간 2000억 원대의 적자를 내던 ‘미운오리새끼’였다. 장기 워크아웃 상태에서 거대 부채를 안고 있어 시황 사이클에 따라 실적 변동이 큰 메모리반도체 산업계에서 불황을 버텨낼 체력이 부족했다. 2011년 인수전에서도 SK 내부에서 무리한 투자라며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최태원 회장은 반도체가 새로운 성장동력원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인수했다.

최 회장의 하이닉스 인수 결정은 SK가 내수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일대 반전을 이끌어냈다. 인수 후에도 최 회장은 업황 부진으로 다른 반도체 기업이 투자를 줄일 때 정반대로 투자를 늘려 갔다. 9년간 55조원을 투자해 국내에 축구장 29개 크기의 반도체 공장 4개를 증설했다.

또 반도체용 특수가스(SK머티리얼즈)와 웨이퍼(SK실트론) 회사를 인수한 뒤 집중적인 투자를 단행, 반도체 연관제품을 전략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했다. 그렇게 인수금 3조4267억원의 하이닉스는 시가총액 80조원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 역대급 실적

최종현-최태원, 두 회장의 대를 이은 인수전은 사업보국의 모범 답안이 됐다.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는 올해 역대급 실적을 쌓고 있다. 1분기에만 32조6944억원의 역대급 성과를 달성했다.

SK텔레콤은 5G 가입자가 100만명 이상 증가하며 전년 동기 대비 4% 증가한 4조277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SK이노베이션은 정제마진 급등과 유가 상승으로 1분기 매출 16조2615억원, 영업이익 1조6491억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대 분기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SK하이닉스는 작년 말 인수한 인텔 낸드사업부 실적이 더해져 역대 1분기 최대 매출인 12조1557억원, 영업이익은 두 번째로 높은 2조8596억원을 달성했다.

SK는 내년 창업 70주년을 앞두고 ‘만년 3등’의 설움도 씻어냈다. 공정자산 292조원(2021년말 기준)을 보유하며 대기업 자산 순위 2위로 2006년 이후 3위 자리에 머무른 지 16년 만에 한 단계 상승하는 역전극을 펼쳤다. 최 회장은 1998년 총수로 선임될 때 불과 34조원이었던 그룹 자산을 24년 만에 8.5배로 불리며 최 선대회장이 남겨준 유산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는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가 이사회 중심으로 추진해 온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중심 비즈니스 모델 전환과 차세대 성장동력 투자가 성장의 주춧돌이 됐다는 평가다.

SK이노베이션은 기존 정유‧석유화학에 더해 SK온을 자회사로 분사하고 글로벌 배터리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SK텔레콤은 AI 기반 ICT 기술 및 서비스 기업으로 변모 중이다. SK하이닉스는 2017년 키옥시아(옛 도시바 메모리) 지분에 투자하고, 2020년에는 인텔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업부를 10조3000억원에 인수하는 등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완전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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