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만삭 아내 살해혐의 벗은 남편의 역습
한국어 실력으로 엇갈린 보험금 100억원 소송
[데일리한국 박재찬 기자] 지난 2014년 8월 23일 경부고속도로 천안IC 부근에서 스타렉스 승합차를 몰고 가던 중 갓길에 주차된 화물차를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동승했던 캄보디아 출신 임신 7개월의 당시 24세의 아내가 숨졌다.
남편 이 씨는 2008~2014년까지 아내를 피보험자로, 자신을 수익자로 하는 보험 25건을 가입했다. 보험금 원금만 95억원, 지연이자까지 합치면 100억원이 넘는다. 사고 후 검찰은 이 씨를 살인·보험금 청구 사기 등 혐의로 기소했다.
재판부는 1심 무죄, 2심 살인혐의 유죄에 따른 무기징역을 선고됐으나, 대법원은 살인혐의 무죄,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이 씨는 살인 무죄와 특례법 위반 혐의로 금고 2년을 확정받았다.
당시 대법원은 “범행동기가 선명하지 못하다”며 살인·사기 등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고,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금고 2년을 확정했다.
이후 살인 협의를 벗은 이 씨의 보험사를 상대로 한 본격적인 역습이 시작됐다. 이 씨가 2016년 8월부터 보험사를 상대로 보험금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 결과 이 씨는 메리츠화재, 삼성생명, 교보생명, NH농협생명을 상대로 승소했다. 반면, 미래에셋생명과 라이나생명을 상대로 한 보험금 지급 소송에서는 이 씨가 패소했다.
그렇다면 같은 사건, 같은 피보험자를 두고 법원이 각각 다른 판결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재판부는 이번 민사소송의 판결을 위해 피보험자의 한국어 실력에 주목했다.
결국, 사망한 이 씨의 아내가 보험 내용을 이해할 정도의 한국어 실력을 갖췄는 지를 기준으로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한 것이다. 피보험자가 자신의 사망을 담보로 하는 보험계약을 체결할 때,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서면 동의를 한 것이라면 보험계약이 무효로 간주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생명의 보험금 소송을 심리한 재판부는 이 씨의 아내가 보험계약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정도의 한국어 실력을 갖췄다고 판단하고 이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시 민사37부는 이씨의 아내가 한국어를 잘 알아들었다고 한 보험모집인의 증언과 그가 꾸준히 한국어 공부를 했던 점 등을 근거로 “보험계약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보험계약 청약서에 자필로 서명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미래에셋생명 보험금 소송을 심리한 민사36부는 보험사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이 씨가 제출한 아내의 한국어 연습 노트를 보더라도 간단한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한국어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며 “이씨의 아내가 계약서에 자필로 서명한 점은 인정하지만, 한국어 실력을 고려했을 때 계약 내용을 이해하고 계약을 체결했다고 보기 어려워 서면 동의에 흠결이 있다”고 판단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 자크 라캉이 1966년에 발간한 ‘에크리’라는 논문집이 있다. 라캉은 에크리를 가리켜 “읽을 수 없는 책”이라고 말했다. 독자가 문자 자체는 읽을 수 있지만, 계속 미끄러져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보험상품 약관과 상품설명서는 라캉의 에크리 같다. 약관은 일반 소비자가 이해하기에 해석이 필요할 정도로 어렵고, 판매과정에서 소비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상품설명서도 소비자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내용이 많다. 물론, 사망한 이 씨의 아내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남편이 95억원의 보험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을지는 지금으로서 알 수 없다.
최근 라캉의 에크리 같은 영화 한편이 개봉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이다. 개인적으로는 박 감독의 영화들이 언어, 욕망, 무의식 등을 다루는 방식에서 라캉의 철학과 맞닿는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산 정상에서 추락한 한 남자의 변사 사건의 담당 형사 ‘해준’과 사망자의 아내 ‘서래’의 이야기다. 해준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 탐문과 신문, 잠복수사를 통해 서래를 알아가면서 의심은 점점 관심으로 변하게 된다.
서래는 해준에게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해준과 서래의 사랑이 각각의 방식으로 표현이 순간,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포착하고 있다.
“사상이 언어로 표현되면, 그것은 본래의 뜻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이 있다. 언어는 타자에게 전달되는 순간 그 의미가 모호해지고, 애매해지고 심지어 다른 여러 의미로 해석되고 받아들여 진다.
지금 당신에게 “보험 가입하세요”라는 말은 어떤 결심을 하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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