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또 하나의 ‘김우중 유산’이 간판을 내립니다. 한때 대한민국 재계 서열 2위에 올랐던 대우그룹의 명맥을 이어온 대우조선해양이 오는 23일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1978년 대우그룹의 품에 안겨 대우조선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지 45년 만에 사명에서 대우를 떼어내는 모습에 전직 ‘대우맨’들은 착잡한 기분이 들 만합니다.
그룹이 외환위기를 넘기지 못해 주축 계열사들은 다른 그룹으로 인수·합병됐음에도 한시적으로나마 사명에 ‘대우’라는 간판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우조선해양은 한화가 인수하자마자 사명이 바로 교체됩니다.
각자도생의 파고 속에서도 꿋꿋하게 대우 이름을 지켜온 대우조선해양의 퇴장을 계기로 세계를 호령했던 대우의 흔적과 유산에 새삼 재계의 관심이 쏠립니다.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대우라는 브랜드가 여전히 대우(待遇)받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시계를 돌려보면 1980~1990년대가 대우의 최전성기였습니다. 김우중 대우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철학으로 대표되는 ‘세계경영’ 선언이 나온 시기입니다.
튼튼한 가전제품을 만들겠다는 슬로건인 ‘탱크주의’도 이때 나왔습니다. 계열사 41개, 해외법인 396개, 국내외 임직원 35만여명을 거느리고 창립 30여년 만에 78조원의 자산을 쌓아 올린 ‘대우제국’의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는 그야말로 화려했습니다.
대우 해체 이후 타 그룹에 인수된 계열사들이 한동안 대우 꼬리표를 떼지 않은 대목은 당시 글로벌 시장에서 대우라는 브랜드가 얼마나 막강한 경쟁력을 가졌었는지 대변해줍니다.
현재 국내 가전시장 쌍두마차인 삼성전자‧LG전자와 경쟁했던 대우전자는 2006년 파산 뒤 대우일렉트로닉스, 동부대우전자, 위니아대우 등으로 간판을 바꾸면서도 대우 이름만큼은 포기하지 않다가 2020년에야 위니아전자로 공식 변경했습니다.
‘증권 사관학교’라 불리던 대우증권도 미래에셋증권에 인수된 뒤 미래에셋대우를 사용하다가 인수 5년 만인 2021년에 들어서야 미래에셋증권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김우중 회장이 각별히 공들였던 대우자동차 역시 2002년 미국 GM이 인수한 뒤 GM대우로 새 출발했다가 9년 만인 2011년 한국GM으로 사명을 교체했습니다.
드라마 ‘미생’의 배경이 됐던 대우인터내셔널은 2010년 포스코그룹에 인수된 뒤에도 포스코대우로 대우 명맥을 잇다가 2019년에야 포스코인터내셔널로 재탄생했습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대우의 상표권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해외에서의 대우 브랜드 파워는 지금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지난해에만 91억원의 상표권 수익을 냈습니다.
김우중 회장이 개척했던 동남아와 중동, 중남미 지역의 해외 가전기업들이 여전히 대우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최근 특허청에 대우 상표권과 브랜드 로고를 재출원하기도 했습니다.
대우맨들의 활약도 여전합니다. 김우중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국내 3위 부호인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입니다. 34살의 나이로 대우자동차 임원으로 발탁됐던 서 회장은 실직의 설움을 딛고 5000만원으로 시가총액 20조원이 넘는 기업을 일궈내며 바이오 업계의 상징이 됐습니다.
‘한화오션’으로 탈바꿈하는 대우조선해양의 사내이사로 합류하는 정인섭 전 한화에너지 대표이사는 김우중 회장 비서실 출신입니다. 대우조선해양은 사라져도 ‘대우정신’은 남는 셈입니다.
대우맨들은 ‘김우중 사관학교’로 불리는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설립해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 유고를 살려가고 있기도 합니다. 대우 출신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연구회는 글로벌청년사업가양성사업(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청년들의 글로벌 취업과 창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저력 있는 계열사와 넓은 인재풀을 자랑했던 대우의 해체에 안타까워하는 이들은 당시 그룹 해체가 성급했던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내놓기도 합니다.
대우조선해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만 대우의 ‘명맥’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재계 곳곳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유형의 유산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대우건설과 대우산업개발, 타타대우상용차(옛 대우자동차 트럭제조부문)는 육대주 오대양을 일터로 삼았던 대우정신을 되새기며 국부(國富) 창출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해체된 지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매년 3월22일 한자리에 모여 창립기념일 행사를 치르는 충성도 높은 대우맨들이 버티고 있는 한, 오래된 벽지 얼룩처럼 대우그룹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