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민병무 기자] 모두들 임윤찬을 보기 위해 광클을 했다. 입장권은 예매를 오픈하자마자 1분도 안돼 두번의 공연이 전석 매진됐다. 서울 시민 100명(1인당 2매)을 초대하는 추첨 티켓에도 1만6800여명이 몰려 337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피케팅’에서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이 합창석까지 꽉 메웠다. 이빨 빠지듯 채운 것이 아니라, 시루 속 콩나물처럼 빽빽하다. 공연 시작 전 포토월 앞은 사진을 찍으려는 관객들로 북적거렸다. 프로그램북을 사려는 줄도 길게 늘어섰다.
요즘 가장 핫한 피아니스트의 힘이다. 지난달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임윤찬(2004년생)은 ‘얍 판 츠베덴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서울시향 음악감독 취임 음악회의 협연자로 나섰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했다. ‘소년에서 성인으로’ 더 완숙한 음악을 들려줘 브라보 환호를 받았다. 26일 롯데콘서트홀 무대에서도 아이돌 뺨치는 인기를 보여줬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올해 스무 살의 피아노맨 못지않게 얍 판 츠베덴(1960년생)과 서울시향의 파워가 놀랍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1번 ‘거인’을 들려줬는데,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카멜레온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는 음악감독의 포부가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음을 입증했다. “임윤찬을 보러왔다가 판 츠베덴의 서울시향에 반했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말러는 생전 9개의 교향곡(따로 번호를 붙이지 않은 ‘대지의 노래’ 포함)을 썼다. 1악장만 완성한 미완성 작품을 포함하면 10개다. 자신의 몸속에 저장된 많은 음악을 교향곡 안으로 끌어들였다. 어린 시절 들었던 군대 행진곡, 아버지가 운영하던 허름한 술집에서 흘러 나왔던 유행가, 농부의 흥겨운 춤곡, 저잣거리를 떠도는 장사꾼의 음악을 과감하게 차용했다. 자신이 작곡한 가곡 선율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경계를 구분 짓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흡수하는 것, 이게 바로 말러 음악의 특징이다.
서울시향 제3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판 츠베덴은 앞으로 5년 동안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그 첫 번째로 1번 ‘거인’을 선사했다. 젊은 말러가 청춘의 모든 희망과 절망을 담아낸 자기 고백의 심포니다. 첫 구상에서 최종 수정까지 대략 15년이 걸렸다. 판 츠베덴은 로열 콘세트르헤바우와 뉴욕 필하모닉과의 첫 공연에서도 이 곡을 선택했다. 그에겐 신성한 의식과도 같은 곡이리라.
말러는 1악장을 ‘음악이 아닌 자연의 음향’이라고 불렀다. 그의 정의를 입증하듯 서울시향은 여기저기서 신비로운 소리를 쏟아냈다. 3명의 트럼펫 연주자는 무대 오른쪽 출입문 안쪽에서 희미한 팡파르를 울렸다. 어둠을 뚫고 오는 새벽의 소리다. 클라리넷은 다양한 음을 풀어 놓았다. 뻐꾸기 소리를 닮았다. 이어 첼로가 말러의 가곡집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총 4곡) 중 두 번째 곡인 ‘오늘 아침 들판을 걷네’의 선율을 연주했다. 소리는 안개 속에서 피어올라 합쳐지고 흩어지며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존재론적 의미로까지 확장됐다.
2악장 스케르초는 브루크너풍의 렌들러(오스트리아와 독일 남부 지방에서 유행한 춤곡)다. 각 악기 군이 차례대로 한 묶음으로 움직이는 집합연주를 보여줘 볼만했다. 우아한 군무였다. 부드러운 선율이 흐른 뒤, 다시 각 악기 그룹이 순번을 정해 웅장한 소리를 울렸다.
팀파니와 더블베이스의 듀오로 3악장이 시작됐다.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동요 ‘프레르 자크(Frère Jacques)’의 선율을 음산하고 괴기스럽게 비틀어 연주했다. 애초에 D장조였던 것을 d단조로 바꿔 장송곡으로 만든 것. 바순, 첼로, 팀파니, 플루트 등이 하나씩 가세하며 음을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엄밀한 수학적 규칙성이 지배하는 듯한 사운드다. 느린 부분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말러가 자신의 가곡 ‘내 연인의 푸른 눈동자’(가곡집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제4곡)을 인용한 대목이다.
3악장에서 4악장은 잠시의 쉼도 없이 아타카(attacca)로 이어졌다. 말러는 한때 마지막 악장에 ‘지옥에서 천국’이라는 표제를 붙였는데, 단테의 ‘신곡’을 염두에 둔 타이틀이다. 3악장에서 켜켜이 빌딩을 올린 온갖 소리들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강한 충격과 강렬한 불협화음으로 만들어진 아우성이다. 심연의 절망이 아름다운 선율을 거쳐 장대한 코랄풍 선율로 마무리됐다.
호른은 4악장의 상징이다. 심지어 연주자 8명이 모두 함께 일어나 연주했다. 옆자리에 있던 5번 트럼펫 연주자도 동참해 스탠드업 자세로 소리를 쏟아냈다. 흔치 않은 장면이다. 기립 연주는 폭풍 같은 음량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시각적으로도 극적 연출을 보여줬다. 이처럼 오케스트라 단원이 대열을 벗어나 출입문·합창석 등에서 따로 연주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잘 보이도록 연주하는 것을 ‘반다(banda)’라고 한다. 말러는 악보에 ‘반다’ 표시를 해놓았다.
그런데 프로그램북에는 분명 호른 연주자가 7명이라고 적혀있는데 8명이다. 궁금했다. 서울시향은 “호른 수석, 즉 퍼스트(first)가 연주해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나 솔로 파트가 많아서 역할이 가중되는 경우 어시스트를 붙여서 서포트하기도 한다”라며 “말러 1번은 워낙 대편성인데다 섬세한 연주도 요구되기 때문에 어시스트를 1명 추가해 8명이 연주했다”고 설명했다. 의문이 한방에 풀렸다.
엄숙한 금융권에서도 이런 ‘반다 파격’이 나왔다. 지난해 11월 KB금융 사령탑에 오른 양종희 회장은 비은행장 출신이다. 그동안 그룹 내 계열사 중 가장 높은 매출·이익 비중을 차지하는 은행의 행장이 회장으로 선임되던 관례가 있었지만 과감히 루틴을 깼다.
양 회장은 지주 전략기획 담당 상무 시절 LIG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 인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능력을 인정받아 전무와 부행장을 건너뛰고 부사장으로 파격 승진했다. 2016년부터 KB손해보험 대표를 맡았고, 3연임 성공을 이뤄내면서 KB손해보험 순이익을 끌어올렸다. 이후 2020년 KB금융 부회장으로 승진한 후 탄탄하게 입지를 구축했다. KB금융은 지난해 연간 당기순이익 5조원 돌파가 전망되면서 리딩금융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파격의 약발’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갈지 기대된다. 말러 교향곡 1번만큼의 멋진 성과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