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김정우 기자]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시행으로 북미 진출이 막힌 중국 배터리 기업들이 유럽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먼저 현지에 진출한 한국 배터리 기업들과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12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유럽연합(EU) 배터리 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의 점유율은 2020년 14.9%에서 지난해 34.0%로 급증했다. 반면 같은 기간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한국 기업들의 점유율은 68.2%에서 63.5%로 떨어졌다.
유럽은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전기차 시장이다. EU는 강력한 탄소중립 기조에 따라 2035년부터 내연기관 신차 판매를 중단하고 전기차 시대로의 전환을 계획하고 있는 만큼 차량용 배터리 수요도 지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자동차제조협회(ACEA)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EU 27개 회원국에서 판매된 전기차 신차는 112만여대로 전년 대비 28% 증가했다. 전체 신차 판매량 가운데 전기차 비중은 2019년 1.9%, 2021년 9.1%에 이어 지난해 12.1%로 크게 늘었다.
또 다른 주요 시장인 북미에서 미국이 IRA 시행 등을 통해 중국 기업들의 진입을 견제하고 있는 반면 배터리 EU는 수요 충족과 시장 활성화를 위해 중국의 투자를 반기고 있어 먼저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에게 위협적이다. 실제 독일, 헝가리, 폴란드 등 EU 회원국들은 배터리 기업 유치를 위해 대규모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3사는 일찌감치 유럽 현지에 배터리 공장을 건설해 가동 중이다. 3사의 EU 내 배터리 생산능력은 지난해 말 기준 116.5GWh로 EU 전체 배터리 생산 능력(274.2GWh)의 42.5%를 차지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 브로츠와프에 70GWh 규모의 생산 시설을 구축했고 2025년까지 45GWh를 늘릴 계획이다. SK온은 헝가리에 7.5GWh와 9GWh 규모의 배터리 1·2공장을 가동 중이며 2024년 이반차 공장까지 완공되면 유럽 내 연간 생산량은 47GWh 규모로 늘어날 예정이다.
삼성SDI는 헝가리 괴드에 30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운영 중이며 2025년까지 10GWh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국이 주도하는 유럽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서고 있다. 세계 배터리 시장 점유율 1위 CATL은 2019년 약 18억유로를 투자해 독일 공장을 착공, 지난해 말부터 가동을 시작했으며 2028년까지 독일, 헝가리 등에 배터리 공장 신·증설을 통해 총 200GWh 규모의 생산 능력을 확보할 방침이다. 헝가리에 설립을 추진 중인 연산 100GWh 규모 공장 투자 금액은 73억유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터리는 수주 산업으로 대규모 투자가 선행돼야 점유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인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몸집을 키워온 중국 기업들에 비해 제한된 자금력으로 북미와 유럽 시장을 동시 공략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게 불리한 부분으로 평가된다.
중국 기업들이 생산하는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는 점도 위협이다. 전기차 원가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40%에 달하는데 LFP 배터리는 한국의 주력 제품인 삼원계 배터리 대비 약 20~30% 저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가격 경쟁력 때문에 테슬라 등 주요 완성차 기업의 중국산 배터리 채택 비중이 빠르게 늘고 있다.
실제 올해 1분기 세계 각국에 등록된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SNE리서치 집계)을 보면 1·2위는 중국 CATL(35.0%)과 BYD(16.2%)가 각각 차지했고 지난해 1분기 2위였던 LG에너지솔루션은 점유율이 14.5%로 0.1%포인트(p) 떨어지면서 3위로 내려앉았다.
SK온과 삼성SDI까지 한국 3사의 점유율 총합은 26.0%에서 24.7%로 1.3%p 하락했다. 중국을 제외한 시장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이 1분기 기준 점유율 28.0%로 선두지만 2위 CATL이 점유율 24.4%로 지난해 같은 기간 9.6%p였던 격차를 3.6%p까지 빠르게 좁혔다.
반면 업계에서는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먼저 세계 시장에서 기술력을 검증 받고 완성차 업계와 협업 관계를 구축한 만큼 쉽게 주도권을 내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이미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3사도 LFP 배터리 개발에 착수했으며 기존 삼원계 배터리와 양극재 경쟁력을 바탕으로 하이니켈 배터리 등 제품 성능을 높이며 기술 격차를 유지하는 등 대응에 나서고 있다.
여기에 EU가 올해 ‘그린딜 산업계획’ 일환으로 발표한 핵심원자재법(CRMA) 등을 통해 중국 등 특정국에 대한 공급망 의존도를 낮추고 환경·노동 등에 대한 규제 강화 기조를 이어가는 점은 탄소배출 저감, 재활용 의무비율 설정, 배터리여권 도입 등 현지 정책에 대한 대응을 추진해온 한국 배터리 경쟁력에 긍정적 부분으로 평가된다.